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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자 0형 아줌마의 사는 이야기

해피엔딩, 관점의 차이


최근 작품성과 흥미를 다 갖춘 드라마로 '뿌리깊은 나무'를 손꼽습니다. 다들 왜 그 드라마를 보지 않았느냐고 묻습니다. 저는 주로 코믹을 보는대다 사극을 안좋아 합니다. 헌데 뿌리를 한두번 봤는데 사극이라고 할 수 없게 재밌게 만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재방송을 보지 않습니다.

 

"뿌리깊은 나무 보라니까 왜 안봐요?"

"그거 해피엔딩 아니라며?"

"왜 해피엔딩이 아니야? 해피엔딩인데?"

"주인공이 다 죽는다는데?"

"주인공은 다 죽죠."

"야! 주인공이 다 죽는데 어떻게 해피엔딩이야?"

"한글이 반포되잖아요!, 한글 반포가 중요한거지."

 

'뿌리'를 강추하는 한 도반은 저와 다르게 그 드라마를 해피엔딩으로 봤습니다. 주인공이 죽는 것보다 '한글반포'가 그 드라마의 핵심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보는 각도에 따라 똑같은 드라마의 결론이 어떤 이에게는 감동으로, 어떤 이에게는 슬픔으로 남습니다. 법륜스님께서 늘 사물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고 하시는 것이 바로 그 뜻이겠지요.

 

왜 스님 말씀이 다른 곳에서, 다른 사람에게는 객관적으로 적용 되는데 유독 내 자신의 문제로 올 때는 안되는지 답답합니다. 스님께 질문하는 사람을 보면 '이렇게 하면 되지'라고 말은 엄청 잘하는데 말이죠. 아무리 유명한 불교학자라 하더라도, 존경받는 스님이라 하더라도 마음이 괴롭다면 그건 부처님 법을 안다고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저는 자꾸 행복을 어떤 무엇이 해결되면 행복할거라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가게를 그만 두고 나 하고 싶은대로 여행다니면서 살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생계형으로 돈을 벌지 않고 내 하고 싶은 일을 하면 행복해질거라고 착각합니다. 행복은 바로 여기에 있는데 현재를 만족하지 않고 무엇무엇이 해결되어야 행복하다고 자꾸 상을 짓습니다. 스님 법문은 많이 들어서 머리로는 알고, 가슴은 꽉 막혀 이해가 안되고 있습니다.

 

내 스스로 만든 행복상에 갇혀서 조금이라도 비집고 나오는 내 꼬리를 보면 사정없이 밟아서 아프게 합니다. 아니 부처님 법을 만났으면 불행에서 바로 행복으로, 부정에서 바로 긍정으로 가야하는 것 같은데 멈춰있거나 요즘은 후퇴도 합니다. 지금의 일보 후퇴가 이보 전진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하늘이 흐립니다. 봄을 재촉하는 비라도 올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