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회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가장 안좋은 것은 가족간에 시간을 맞춰 만나기 어렵다는 겁니다. 친구들과 인간관계가 정리된 것은 말할 것도 없구요. 제 머리속엔 동창이란 단어도 사라지고, 소꼽동무라는 단어도 지워진지 오래됐습니다. 가족들이 모임을 할 때 꼭 제가 안되는 날이 많아 눈총을 받습니다. 심지어 교회다니는 언니들이 일요일날 저한테 맞추겠다는데도 제가 시간이 안나는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무슨 절이 주말도 없느냐고 합니다.
그런 제가 지난주는 시간이 났습니다. 이번주부터는 또 일정이 빡빡하게 돌아가기에 친정부모님께 다녀왔습니다. 이사를 하셨는데 도와드리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일을 잘 못하니까) 언니들이 정리를 했다니 저는 시찰나가는 마음으로 갔습니다. 또 부모님께서 밭에 가신다기에 오랫만에 딸노릇 좀 해보기로 했습니다.
엄마는 제게 아침밥을 엄마네 집에 와서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저도 자식이 있는데 자식들 밥을 주고 가야한다고 말하려다 말았습니다. 친정 엄마 마음은 조금이라도 일찍 와서 제가 좋아하는 된장찌게에 밥도 먹고, 이야기도 하고 싶어서라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침에 눈뜨니 8시가 다 됐습니다. 엄마는 그때 전화를 하셨습니다.
"어디쯤이고? 지금 느아부지 마중 나갈까?"
친정엄마는 제가 이사한 집을 모르니 도착할 무렵에 마중을 나오시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아직 출발도 안했는데 '헉' 하는 마음입니다.
"엄마, 지금 가는 중인데 금방 출발했으니까 전화하면 나와"
일단 거짓말을 해놓고 급하게 옷을 입고 아이들에게 대충 먹으라고 하고는 튀어나갔습니다. 제가 아버지께 5분 후에 나오시라고 했는데 아버지는 제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나와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바람도 많이 부는데...
"니, 우리 집 보면 바꾸자고 할끼다. 웃돈 주면 내 바꿔줄끼구마"
"아이고. 이 촌구석 15년도 넘은 아파트하고 제가 왜 바꿔요?"
"에이. 니 보면 바로 바꾸자고 할낀데. 을매나 좋은지 아나? 니 바꾸자케도 안바꿔줄끼다"
"어머, 그러세요? 아부지 제 콧구멍이 다행이 두개여요."
친정엄마는 늘 아버지 말씀에 콧구멍이 두개라 숨쉰다고 하셨습니다. 나름 유머지요. 부모님께서 이사한 집은 낡은 아파트긴 하지만 해가 잘 드는 남향입니다. 집 판 돈으로 새 아파트를 얻으면 좋으련만 부모님은 빚있는 자식 이자를 줄여주고 싶은 마음에 또 희생을 하십니다. 두 노인네가 사는데 45평 새아파트가 무슨 소용이냐고. 32평이면 적당하고 낡아도 해가 잘 들어 괜찮답니다. 나름 괜찮습니다. 아주 구닥다리 살림이 그대로니 바뀐 것은 전혀 없지만서도요. 버릴 것은 좀 버리고 왔어야는데 이건 이래서 못버리고, 저건 저래서 못버린다고 하시면서 다 싸짊어지고 오셨습니다.
<아부지 콘테어너, 가끔은 엄마를 피해 찾는 피난처^^>
부모님을 모시고 일산 밭으로 갔습니다. 버스와 전철을 타고 가면 2시간, 차로 가면 1시간 걸립니다. 바람이 불어 밭일은 할 것이 없고 콘테이너를 정리하고 감자 씨눈을 잘라서 땅에 파묻는 일을 해야 한답니다. 저는 콘테이너 정리라는 말에 약간 싫은 마음이 올라왔습니다. 왜냐면 언니가 따라온 것도 아닌데 제가 어떻게 정리를 하나 싶어섭니다.
"엄마, 정리를 한다고 진작 말했어야지. 그럼 큰언니라도 데불고 오지"
"아이고, 내가 할낀게 걱정마라. 너는 그냥 옆에서 얘기하면서 쉬어라"
밭옆에 있는 콘테이너 박스 안에 들어가니 정리할 것들이 많습니다. 제 가슴이 턱 막혔습니다. 제가 정리를 못해서 언니가 와서 집안일을 대신 해주는데 하필 내게 이런 시련이 오다니... 엄마는 걸레를 가지고 슥슥 정리를 시작하셨습니다. 저는 옆에서 옷가지를 여기로 옮겼다 저기로 옮겼다 하다 감자 씨눈 자르는 일을 했습니다. 처음 알았습니다. 감자 씨눈을 잘라서 심으면 감자가 난다는 것을요. 감자 씨를 뿌리는게 절대 아닙니다. 상추도 심었는데 상추는 씨를 뿌립니다. 골을 내서 그 안에 씨를 넣습니다.
<옴폭 들어간 것이 감자 씨눈입니다>
<감자 씨를 중심으로 조각을 내서 땅에 파 묻어둡니다>
"영숙아. 이 땅 싸게 줄게 니 살래?"
"아부지, 내가 이 땅 사서 뭐하게?"
"뭐하긴 이 땅 농사 잘댄대이. 니가 산다쿠먼 내 싸게 주지"
"흥, 아부지 어짜피 이 땅 내 꺼 될텐데 내가 왜 돈주고 사나? 내가 바본가~"
무서븐 우리 아부지. 딸한테 땅을 팔려고 하시다니^^ 아부지는 주실 생각은 안하는데 제가 한 술 떠서 먹을 생각을 합니다. 상추씨를 뿌리시면서 아부지가 농담을 하셨습니다. 제 아부지가 농담을 곧잘 하십니다.
"느아부지는 밥먹고 그리 씰데없는 소릴 하고 잡소?"
"엄마는 그게 왜 씰데없는 소리야, 유머지. 그지 아부지?"
"하모(그렇지)"
<상추씨를 심으시는 부모님>
친정엄마는 진짜 유머를 모르시는 분이시기에 이해를 잘 못하십니다. 친정엄마는 아줌마들이랑 놀러 다니는 것도 싫어하고, 시답잖은 말하는 것도 싫어하십니다. 더군다나 화투같은건 더 싫어하십니다. 친척 이모들이 명절에 놀러와서 화투장 꺼냈다가 엄청 혼나서 저희집은 명절에도 화투놀이라는 문화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다 잘하는데 그 흔한 고스톱을 못 칩니다.
"아부지, 콘테이너 박스 저 옆집처럼 좋게 지어줄까?"
"옆집거는 너무 크고 콘테이너 창고형으로 하나 더 있으면 좋을거는 같은데"
그 소리를 듣던 엄마가 펄쩍 뛰십니다.
"무슨 소리하요? 농사를 본격적으로 지을랑가베. 소일거리로 해야지, 힘들어서 못하요. 우리 나이가 몇이요?"
생각해보니 작년 죽어라 농사짓는 부모님 때문에 자식들이 얼마나 걱정하고 같이 농사일 거드느라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저야 바쁘다는 핑계로 안갔지만 아들 둘과 언니 둘은 죽어라 휴일마다 밭일을 했습니다. 자식들이 고개를 다 절래절래 흔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의 열정을 가로막지 못해 올해도 자식들이 돌아가면서 부모님 밭에 가서 일을 돕고 있습니다.
"영숙아. 내 맛있는거 사주게. 니 뭐 먹고 싶노?"
"이 동네 맛있는거 파는 집 없어 보이는데?"
"아이다. 저기 가면 있다. 내 오늘 한턱 쏘지"
"그래? 아부지가 아는데 있어요?"
"하모. 니처럼 촌동네(아부지는 강남을 촌동네라고 부르신다) 사는 사람은 이런데 구경도 못해봤을기구마. 거긴 줄을 나래비로 서서 기다린다"
"구레? 그럼 거기 가요. 근데 무슨 식당인데요?"
"기사식당!!!"
제가 친정아부지때문에 뒷골을 잡고 넘어갈 뻔 했습니다. 줄을 나래비로 서는게 바로 택시였습니다. 제가 웃겨가지고. 막 웃는 제게 아부지가 멋적은 표정입니다.
"진짜 맛있대이. 니 몰라서 그라제 닭도 팔고, 안파는기 읎다"
"알았어 아부지. 거기로 가요."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빨강색 간판의 '기사식당'은 문을 닫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옆에 막국수 집에 가서 먹었습니다. 제가 말이 그렇지 부모님 사드리려고 했는데 아부지께서 정말 빨리 드시고 계산을 하십니다. 딸에게 밥사주고 싶어하시는 아부지 마음이 느껴져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것도 복짓는 일이라는 생각에서요.
집에까지 부모님을 모셔다 드리고 차 한잔 마시고 집에 왔습니다. 오랫만에, 정말 오랫만에, 딸노릇을 한 것 같아 기뻤습니다. 제가 딸노릇을 하면서 법륜스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스님께서 너무 바쁘신데 어머님께서 위독하시다는 전갈을 받으셨답니다. 스님의 어머님께서 스님을 보고 싶은데 빨리 못오시니 식구들이 "바빠서 빨리 못온다고"했답니다. 그때 어머님 말씀이 "아무리 바쁘다 해도 내 죽는 것보다 더 바쁜 일이 어딨느냐"고 하셨답니다. 스님께서는 결국 어머님 임종을 보지 못하셨습니다. 그후로 원래도 낮이고 밤이고 없으신 분이신데 더 바쁘게 사신답니다. 왜냐면 당신이 바쁘다고 어머님 돌아가시는 것도 못찾아 뵈었는데 시간을 허투로 쓴다면 돌아가신 어머님께 너무 죄송한 일이라는 겁니다. 그 말씀을 하시는 스님 목소리에서 어머님의 임종을 못 지켜드린 자식의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제가 무슨 큰 일을 한다고 부모님이 보고 싶다고, 와서 이야기도 하고 자고 가라는데 못가니 말입니다. 시골도 아니고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살면서 말입니다. 늙어서 서로 의지하는 부모님을 뵈니 참 좋습니다. 재밌게 사십니다. 티격태격하면서도 돌아서면 상의해서 결정하는 모습이 부럽습니다. 저도 제 부모님같은 부모가 될 수 있을까, 돌아보는 하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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